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문단 편집) === 초기 === 130년경 [[시리아]]의 키루스에서 부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헬리오도루스와 모친 율리아 카시아 알렉산드라 사이에서 출생했다. 부친 헬리오도루스는 [[기사계급]] 출신으로 [[이집트]] [[총독]]을 역임했다. 그리고 모친 알렉산드라는 [[아우구스투스]]의 후손 중 한 명인 유니우스 실리누스의 딸 유니아 레피다[* 아우구스투스의 딸 [[대 율리아]]가 두번째 남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서 얻은 딸 [[소 율리아]]의 외손녀다. 어머니는 아이밀리아 레피다, 아버지는 로마의 오래된 명문귀족 유니우스 가문 출신의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어머니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클라우디우스 1세]]와 약혼했다가, 소 율리아 부부가 불경죄로 아우구스투스에게 처벌받고 몰락해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와 결혼해 낳은 차녀이기도 하다.]의 후손이다. 외조부는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낸 전직 집정관, 전직 보결집정관 출신의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 베레니키아누스다. 따라서 외조부를 통해 [[콤마게네 왕국]]의 마지막 왕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헤로데 왕조]] [[헤로데 대왕]]의 후손을 포함한 여러 [[왕족]]들과 [[친척]] 관계였다.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생애, 경력, 인맥을 살펴볼 때 가장 주목할 부분이 있다면 외조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 베레니키아누스를 빼놓을 수 없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외조부는 헬레니즘 세계의 그리스계 왕국인 킬리키아 왕자로 부친은 아르메니아 왕에 올랐던 [[티그라네스 6세]]의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다. 따라서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외할아버지를 통해 그리스, 아르메니아, 페르시아, 유대, 아나톨리아, 파르티아 왕족들의 피를 모두 물려받았고, 외조부의 혈연과 인맥을 통해 일찌감치 제국 동부의 지역유지들과 자연스러운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허나 외할머니 유니아 레피다는 베레니키아누스의 아내 카시아 레피다의 딸로, [[코르불로]] 장군의 아내 카시아 롱기나의 조카임에도 혈연을 제외하곤 가세가 기운 상태였다. 그 이유는 카시아 롱기나, 카시아 레피다 자매의 아버지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네로]] 시대 후반에 벌어진 [[피소 음모]] 사건[* 고대기록들에 따르면, 피소 친구의 노예 부부가 주인이 피소와 음모를 꾸민다고 고변해 터진 사건이라고 하나 현재는 네로, [[티겔리누스]]가 벌인 자작극이라는 의견이 팽배하다. 저명한 원로원 의원 칼푸르니우스 피소, 네로의 스승이자 권신이었던 [[세네카]]와 세네카의 조카 루카누스 등이 이 사건으로 자살, 처형됐고, 이 사건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딸로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마지막 직계후손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가 네로의 근친상간 요구, 근친혼 청혼을 거절했다가 이 사건의 기획자로 몰려 처형됐다.]으로 66년 추방됐다가 [[베스파시아누스]] 집권 후 추방형 해제가 되었음에도 원로원 의석만 겨우 회복받았기 때문이다. 시리아 키루스 태생이지만, 일찍이 [[로마]]로 돌아와 이곳에서 성장했다. 일찍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스승이었던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헤로데스 아티쿠스]] 등 저명한 학자 밑에서 공부하였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기에 [[장군]] 경력을 시작하여 [[3군단 갈리카]]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 레지오니스의 지위에 올랐다. 161년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파르티아 전쟁]]에 참전해, 전쟁 개전때부터 병참, 행정, 외교, 전쟁수행 모두에서 만점에 가까운 활약을 선보였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165년 군을 이끌고 파르티아군의 병참로를 기습해 로마군이 결정적으로 승리하는데 공을 세웠고, 이후에도 여러 방면에서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공격해 에데사를 시작으로 [[니시비스]], 셀레우키아, [[크테시폰]]까지 함락하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해, 제국 전역에는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파르티아를 넘어 인도까지 진군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다만 로마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페스트]]가 돌면서 로마 제국 전역에 '[[안토니누스 역병]]'이 닥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흔히 [[냉혈한]]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대에는 동시대 사가 [[디오 카시우스]]가 극찬했듯이, 능력이 대단하고 굉장히 멋지고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애초에 그가 냉혈한으로 소문이 난 이유 자체가 로마-파르티아 전쟁 당시 제3 갈리카 군단장에 임명된 뒤 FM대로 군율을 적용해 생긴 이미지에 후일 반란을 일으켜 생긴 것이라서, 진짜 모습과 세간의 평은 '''빈틈없는 영리한 엘리트 상의 전형'''으로 비춰졌던 것으로 보인다. 라틴어, 그리스어, 현지어 모두에 능통하고 능력이 탁월하면서도 문무를 겸비해, [[폼페이아누스]], [[페르티낙스]] 등과 함께 로마-파르티아 전쟁 이후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 엘리트 인재의 대표격이 됐다. 파르티아 전쟁 내내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칭찬했다. 그래서 루키우스 베루스의 형으로 공동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동생 루키우스의 칭찬을 듣고 그를 높게 평가해, 164년 말(혹은 165년 초) 카시우스를 원로원 의원에 임명했다. 어쨌든 164년부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승승장구했는데, 두 황제 중 실질적인 정제와 같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크게 신임해 그를 높이 기용했다. 그래서 166년 5월, 마르쿠스 황제와 [[집정관]]을 함께 역임해, 로마 제국 안에서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임기 후, 마르쿠스 황제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로마 제국 총독 중 "꽃 중의 꽃"이라는 평을 듣는 위상과 실권 모두 최고 자리인 시리아 코일레 속주 총독에 임명했다. 이는 황제가 그를 직접 점찍어, 제국 동방 일대 최고 책임자로 삼았던 것을 의미했다. 그는 동방의 정세에 밝고 군대를 정예로 육성하는 솜씨가 탁월하여, 시리아 속주에 주둔 중인 로마군의 기강을 유지시켰으며, 동방에서 소요가 일어나는 즉시 신속하게 진압하였다. 170년경 이집트 주민들이 곡물 가격 인상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달려갔다. 반란 규모가 상당했고, 반란군이 이집트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벌였기에 까다로웠지만, 그는 5년 안에 진압에 성공했다. 당시 게르만족의 연이은 침략을 막느라 정신없던 마르쿠스는 동방을 훌륭히 다스리는 그를 매우 신뢰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마르쿠스와 [[황후]] [[소 파우스티나]]는 순한 성격인 [[콤모두스]]의 앞날을 걱정하여 카시우스를 후견인으로 삼을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